[틀:다른 뜻]


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png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png 대한민국 여당
열린우리당
,(2004.5~2007.2),
한나라당
(2008.2~2012.2)
새누리당
,(2012.2~2017.2),

파일:1997 한나라당 로고.png파일:1997 한나라당 로고.png 파일:NEW 한나라당 로고.png파일:NEW 한나라당 로고.png
초기 로고 (1997.11.21~2004.03.23) 4대 지도부 취임 직후부터 사용된 로고[3] (2004.03.23~2012.02.13)

한나라당
공식명칭한나라당
(한나라黨, Hannara Party 또는 Grand National Party)
창당일1997년 11월 21일 (통합민주당과 합당)
당명 변경 2012년 2월 13일 (새누리당)
2017년 2월 13일 (자유한국당)
해산일2020년 2월 17일 (미래통합당 창당)
선행조직신한국당, 통합민주당
중앙당사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18
(여의도동, 한양빌딩)
대통령이명박/ [17대]
국회의원176석 / 295석(18대 국회, 당명 변경 직전)
당 색파란색 (#0000A8, 2004년 3월 23일까지)
파란색 (#0095DA, 2004년 3월 23일이후)
이념보수주의, 신자유주의
정책 연구소여의도연구소

목차

1. 개요
1.1. 당명
2. 계보
2.1. '잃어버린 10년'
2.2. 이명박 정부 - 다시 여당이 되다
3. 당가
4. 역대 당대표
4.1. 총재
4.2. 대표위원
4.3. 대표최고위원
4.4. 원내총무/원내대표
5. 계파 갈등
6. 역대 선거결과
6.1. 대통령 선거
6.2. 국회의원 선거
6.3. 지방선거
7. 각종 논란
8. 그 외
8.1. 성소수자 문제의 스탠스
9. 관련 문서

[틀:-]

1. 개요



1997년 11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정당. 여기서 한은 '크다', '하나', '한(韓)'을 동시에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이다.[4] 영문 명칭은 Grand National Party. 약어가 GNP다. GOP(Grand Old Party)를 별칭으로 쓰는 미국공화당과 당명이 비슷한걸 보면 이쪽을 의식했던지도?

신한국당1996년 12월 크리스마스 노동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직권상정) 파동과 1997년 외환 위기로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자,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인 1997년 11월 통합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되었다.

당의 공식 노선은 반공 색채를 띤 보수주의.[5] 창당 후 아주 잠깐 여당이었다가 야당이 된 뒤[6][7],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10년만에 여당으로 복귀하였으나, 돈 봉투나 대표자 선발에 관련된 비리 등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었다. (차떼기 사건 참조.) 여기에 설상가상, 혹은 사면초가라는 정도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 벌어져 정당 자체의 개입여부는 떠나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고 당시 대통령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했으며, 2012년 열릴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패색이 진해졌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게 됨에 따라 박근혜를 중심으로 한 당 전체 쇄신안을 발동, 결국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위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교체하게 된다.

민주공화당 이후, 즉 민주화 시대 이후 최장수 정당명이다. 격변이 많은 대한민국 정치 풍토에서 한 개의 이름으로 정당을 14년간 유지한 것만 해도 매우 대단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장수한 정당명은 민주노동당이다. 한국의 정당명 중 가장 레전드라는 평가를 받는다.[8]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발음의 수월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 보수당, 민주당보다도 발음하기 쉬운 이름이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hannara.or.kr'이었다.

1.1. 당명


2. 계보

대략적인 한나라당계 정당의 역사

이 정당의 출발은 1963년 박정희가 창당한 민주공화당이며 직접적인 시초는 1990년 1월 창당된 민주자유당(민자당)이다. 당시 대통령 노태우가 총재로 있던 여당 민주정의당(민정당)과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김영삼)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의 이른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것. 특히 민정당의 전신인 공화당은 1963년 박정희가 창당했고 전두환이 창당한 민정당은 그 기반을 일부 흡수하였기 때문에, 한나라당을 깔 때 뿌리가 군사정권 시기의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이라는 공격이 많은 편이다. 다만 YS가 집권한 후엔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공화계와 민정계가 가차없이 축출당함으로써 실질적인 민정계는 절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식으로 홍보를 했지만 ...

어찌됐든 민자당은 1992년 말의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정권을 재창출하는데 성공하지만, 2년여 지난 1995년 초 김종필이 김영삼과의 갈등 끝에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을 창당하면서 떨어져 나가고 그 해 말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 문제와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구설수에 오른다. 결국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꿨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는 139석을 얻으며 상당한 선전을 한다.

15대 대선 국면이었던 1997년 11월 21일에는 민주당[11]과 합당하면서 지금의 당명인 한나라당을 쓰게 되었다.[12]

2.1. '잃어버린 10년'

그러나 새정치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 후보 김대중과 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의 연대(일명 DJP 연합)에 패하면서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을 겪게 된다.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161석의 과반의석을 점하던 한나라당은 철새들의 국민회의 및 자민련으로의 이적으로 과반의석을 상실하게 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상도동계와 민정계, 공화계 중 반 이회창 계열[13]이 탈당한 것이다. 그래도 친 이회창 세력의 민정계와 공화계, 상도동계[14] 덕분에 제1당을 유지했고, 통합민주당 출신[15]까지 합해서는 안정된 의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과반에 육박하는 제 1당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사실상 승리하게 된다. 물론 민정계, 공화계, 상도동계의 원로 정치인들[16]이 은퇴, 공천 탈락, 낙선하지만 다른 의원들 상당수[17]가 당선되며 한나라당 내 민정계와 상도동계, 통합민주당 계열 원로 및 중진들의 세는 크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18] 신진인사들이 재선에 성공[19], 새로운 신진 정치인들도 탄생했다.

당시 민정계는 15대 총선보다 더 세가 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세를 과시하였다.[20]. 당시 한나라당에 남아있던 민정계 정치인은 총 49명이었다. 당시 자민련이나 새천년민주당 세력까지 합치면[21]까지 합하면 당시 국회 내에 남아있던 민정계와 공화계는 총 62명이었다. 비록 15대 국회 때보다 더 세가 줄었지만 국회 내에서 민정계와 공화계는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일부 의원들[22]이 당선무효 또는 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의원 직을 사퇴하거나 잃은 뒤 재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 과반의석을 확보하였고, 연이어 정치신인들[23]이 탄생하거나 재선에 성공했고 이경재, 이해구, 양정규 등의 중진들과 원로들이 복귀했다. 또한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의 국회의원들[24]이 한나라당으로 입당하며 의석이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압승을 거두었으나, 이어 치뤄진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그리고 병풍의혹 등으로 패했다. 이미 15대 대선부터 알려진 96년 안풍사건, 97년 세풍사건, 총풍사건의 "3풍"도 여전했지만, 97년 대선 말 기승을 부린 병풍사건과, 2002년 차떼기 의혹이 그야말로 결정타. 이후 한나라당은 개혁 소장파들이 탈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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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단 대기장

이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으로 17대 총선에서 큰 위기에 몰린다. 중진들[25]과 원로 정치인들이 많이 은퇴하거나 공천 탈락, 또는 낙선한다. 이 때 한나라당 내에서 민정계 정치인들이 많이 없어지고 있었다. 같은 보수정당인 자민련도 같은 상황을 겪었다.[26] 하지만 여전히 민정계와 공화계, 상도동계의 원로 정치인들과 중진들[27]이 무사히 당선되며 아직까지 그 중에는 민정계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정치신인들[28]도 탄생했다. 당시 살아남은 민정계와 공화계[29]는 세가 줄어들었음에도 아직은 건재했다. 이에 자기반성 차원에서 천막당사로 잠시 옮겼었다. 구 여의도 중소기업박람회장 부지로 이후 서울국제금융센터가 자리잡은 곳이다. 이후 일부러(...) 조금 허름한(?) 건물로 옮겼었다. 그 위치는 강서구 염창동 274-17[30], 등촌역LG전자 강서본점 자리다.

그러나, 이런 흑역사를 뒤로 하고 천막당사 시절을 거쳐 2006년 지방선거, 승리로 다시 힘을 비축해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지금도 한나라당 내부에서 뭔가 일이 터지면 당의 일부에서는 '천막당사 시절을 생각하라!'는 투의 반성조의 발언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당 내부에서도 충분히 반성을 하고 되새겨 볼만한 과거였던 듯하다.

그런데 한가지 '반전'으로, 이 천막당사의 임대료는 오히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당사 건물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천막 당사를 설치하기 위해 서울특별시에 임대료로 약 4200만원을 지불하였는데, 총 기간은 50일 정도였다. 반면 당시 열린우리당 당사의 건물 임대료는 월 2500만원 선. 이 때문에 당시에도 보여주기식 행사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으며, 부지 임대에 대한 서울시의 특혜 논란도 약간 있었다(당시 서울시장들이 모두 한나라당이었기도 했다).
한 마디로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쑈였다는 것,

2.2. 이명박 정부 - 다시 여당이 되다

이후 차곡차곡 힘을 길러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며 이원복, 윤두환, 정진석, 이주영 등이 정계에 복귀하고 신상진, 임해규, 차명진, 고희선, 정진섭, 고조흥, 이진구, 정희수, 김정권 등의 정치 신인들이 정치에 진출하며 지지율이 상승하였고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대승을 거쳐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경제살리기 공약으로 2007년 17대 대선에서 승리하게 되어 10년만에 여당이 된다. 이후 2008년 18대 총선에서도 과반수의 의석인 153석을 확보하게 된다.[31] 그런데 당시에 현역 의원들 중에서 공천 탈락, 불출마, 낙선한 사람도 있었다.[32] 그리고 남아있던 민정계들이 거의 공천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무소속, 친박연대 당선 후 복당한 사람까지 합하면 현역 의원들 중에서도 당선된 예[33]도 있고 이 때 당시 민정계는 거의 정치에서 물러났지만 그래도 아직 약간이나마 건재했다. 그리고 정치신인들[34]도 많이 정치에 진출했다. 당시 남아있던 민정계 출신은 김일윤, 이상득, 김형오 등이었다. 또 정몽준 역시 공화계와 민정계의 힘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검역 문제로 인한 2008년 촛불시위, 당내에서 2007년 경선부터 갈라진 자유선진당과 친박(박근혜)계열, 그리고 친이(이명박)세력의 내부 다툼 등으로 인해 2009년 4.29 재보선에서 5곳의 선거구 중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단 한곳에서도 당선되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당시에 구본철, 윤두환, 김일윤이 의원직을 잃었는데 한나라당이 차지하였던 2곳은 민주당에 빼앗기고, 그래도 친박 계열 무소속이 당선된 경주는 보수텃밭을 사수했다. 당시 살아온 보수성향 정치인은 정수성 밖에 없었다.

같은 해 10.28 재보선 역시 5곳의 선거구에서 치러졌는데, 수도권 2곳을 민주당에 내주고, 텃밭인 경남 양산시(당시 단일 선거구. 2016년 분구)에서도 고전 끝에 신승을 거두는 등, 야당에 3:2로 패배하여 심상찮은 민심을 겪어야 했다.[35] 당사자들은 재보궐에서 이만하면 잘했다고 자축했으나, 한나라당이 확실히 승리한 곳은 민주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은 강원도 강릉시 뿐이었다. 그래도 권성동이 정치에 진출했고, 박희태 전 대표가 복귀하며 민정계가 잠깐 다시 숨통을 틔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당 계열 정당에서는 허범도가 의원직을 잃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수도권을 주축으로 혼전이 예상되었다. 야당 측에서는 야권 단일화를 추진했고,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세종시 문제 등 몇가지 이슈로 인해 한나라당이 야당이었던 2006년보다는 고전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실제로 선거는 한나라당의 참패였다. 여당은 선거 전까지는 상당한 우세를 자신하였으나, 막상 선거가 끝나고 보니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서울시장마저 한명숙 후보가 상당히 따라왔으며[36] 부동의 텃밭이라고 생각했던 경남과 충남, 강원도[37]에서도 김두관, 안희정, 이광재 후보에게 져버렸을 정도다. 2030 유권자들은 한나라당 지지자의 2배 이상이 민주당을 지지했다.

패배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당내 내분이 다시 불 붙었다. 경남 도지사를 비롯해 경선에서 승리했으나 본선에서 져버린 친이 계열은 패배의 책임을 추궁받았다. 친박도 역시 박근혜 전 대표가 친박 계열 후보들만 지원 유세를 해줬는데도 친박은 단체장 자리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 친박은 선거 직후인 6월 29일 자유선진당, 민주당과 함께 세종시의 행정도시화를 중단하는 수정안을 부결시켰으며, 이로서 친박이 여당내 야당 노릇을 한다는 사실은 뚜렷해졌다. 결국 친이/친박 모두 대선 후보 지지율 동반 하락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세종시 수정안 부결에도 불구하고, 당시만 해도 현직 대통령의 힘이 아직 강한 집권 3년차였다. 2010년 7월 14일의 제11차 전당대회에서도 안상수, 홍준표, 나경원, 정두언 등 대표적인 친이계 의원들이 대거 대표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친박계 의원은 서병수 한명으로 그나마도 꼴찌였다. 무당파나 개혁계 후보들도 당선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7.28 재보선에서 승리하며 친이계의 좌장격인 이재오가 돌아왔고 이상권, 한기호, 윤진식, 김호연 등의 정치 신인들도 탄생했다. 이후 잠깐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오르게 된다.

하지만 친이계는 나름대로 이명박 대통령과 각을 세우며 차기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이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불만(이른바 "진노")만을 샀다. 이른바 보온병 논란과 함께 안상수 대표의 이미지는 무참하게 무너졌다.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김태호 의원[38]을 제외한 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패했으며, 심지어 민주당 측 이광재 지사의 비리문제로 터진 강원도지사 재보궐 선거에서조차 또 패했다. 한나라당의 텃밭이었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을에서 거물인 강재섭 전 대표가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나가떨어진 것 역시 치명타였다.

안상수 대표는 사퇴했으며, 한나라당은 지리멸렬해지기 시작했다. 원내대표에 황우여 의원, 당대표에 홍준표 의원(전당대회 2등 승계)을 선출하며 당을 일신하려는 노력을 해 보았지만,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 발의한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인하여 그야말로 나락의 길로 떨어지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측했듯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투표율 미달로 개봉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약속한 대로 서울시장을 사퇴하게 되었다.

홍준표 체제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나경원 의원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웠지만 20~40대 유권자들의 이반과 후보자에 대한 각종 의혹과 그에 대한 반박[39] 등으로 인하여 여론이 좋지 않아졌고 결국 야권 단일후보인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1:1 정면 대결에서 패배하였다. (박근혜 전 대표가 선거를 돕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 여파는 커서, 당 내부에서는 백가쟁명식으로 당 쇄신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선관위 DDOS 공격 사건이 벌어지자 당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여당은 그럼에도 한미 FTA 강행 처리를 주도했으나 이 역시 야당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

결국 12월 8일 남경필, 원희룡(당시 소장파), 유승민(당시 친박) 최고위원이 사퇴한 데 이어, 9일에는 홍준표 대표까지 사임하면서 최고위가 사실상 와해되었다.관련 기사 이에 결국 박근혜가 구원투수로 재등판하게 되었다.

2011년 12월 말 비대위가 설치되어서 위원장에 박근혜가 임명되었으며 각종 쇄신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 폭로되면서 한나라당이란 브랜드 자체의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관련기사 결국 상황을 타개하고자 2012년 2월 당의 이름을 바꿔 재결성하게 되었고, 기본적인 당헌과 규칙, 당원들은 새누리당이 승계하게 된다.

3. 당가


(1절) 나라를 책임질 우리는 하나
자유와 정의 넘치는 통일한국 만드세
미래 위한 횃불 들고 함께 나아가자

(후렴) 민족의 꿈을 이루는 새희망 한나라당
국민과 하나되어 사랑받는 한나라당

(2절) 헌신과 봉사의 열정 모아서
희망찬 미래 향하여 우리 두 손 잡았네
21세기 통일한국 함께 열어가요

4. 역대 당대표

아래 대수는 총재, 비대위, 권한대행 등을 가리지 않고 매겨져 있다. 추후 수정 바람.

4.1. 총재


4.2. 대표위원


4.3. 대표최고위원


4.4. 원내총무/원내대표


5. 계파 갈등

선행 조직이었던 민주자유당이나 신한국당 역시 계파간 갈등이 심하긴 했지만 한나라당에 이르러서는 계파 간 갈등이 절정에 이르러서 공천학살과 경선/공천 불복 후 탈당이 밥먹듯 일어났다. 민주자유당의 계파갈등이 민정, 민주, 공화의 3자 대결이었다면 한나라당의 계파갈등은 그 유명한 친이 vs 친박의 양자구도였기 때문.

사실 계파간 갈등이 이렇게까지 심했던 이유는 한나라당이 가진 폭넓은 정치적 스팩트럼이 주 원인이다.

거대 양당의 대립은 진보 vs 보수의 구도가 명확하지만 이 당시 한나라당 vs 민주당계 정당의 구도는 영호남간의 지역구도가 강했다. 그 때문에 한나라당에는 극우적 인물, 중도 우파 성향의 인물 뿐 아니라 개혁적인 인사들까지 여럿 포진해 있었고 다양한 정치 스팩트럼을 가진 이들이 모이다보니 자연히 계파갈등이 심해진 것.

다만 2004년을 전후로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면서 개혁적 색채가 강한 인물들은[77] 열린우리당으로 이탈하고 남은 인물들 중 민정계를 필두로 한 정통 우파세력들은 박근혜, 상도동계[78]를 필두로 한 온건 우파세력들은 이명박을 중심으로 뭉쳤고 여기에 당권을 잃은 이회창계 세력, 그리고 자민련에서 넘어온 구 민정계들까지 합세하며[79] 계파간 갈등은 자연스레 눈덩이처럼 커졌다.

결국 이는 17대 대선, 그리고 18대 총선을 거치며 폭발. 대선에서 승리하며 당권을 장악한 친이계가 친박계의 서청원, 김무성 등을 대거 공천 탈락시키고 이에 반발한 친박계가 친박연대, 친박 무소속 연대를 만들어서 이른바 이재오, 이방호 낙선운동을 벌이며 경남 사천에서 이방호 후보가 강기갑에게 밀려 낙선하고 이재오 역시 은평구에서 낙선했다가 보궐선거로 다시 돌아오는 등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홍준표[80][81] 대표 체제가 무너지고 이명박 정부 말기로 들어서면서 마땅한 대권주자[82]를 세우지 못한 친이계는 자연스레 당권을 빼앗겼고 박근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하여 친이계를 사실상 궤멸시키면서 계파간 갈등 역시 친이 vs 친박에서 친박 vs 비박으로 변화. 이후 새누리당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6. 역대 선거결과

6.1. 대통령 선거

연도 선거명 후보자 득표수 (득표율) 결과
1997년 15대 이회창 9,935,718 (38.7%) 낙선(2위)
2002년 16대 이회창 11,443,297 (46.6%) 낙선(2위)
2007년 17대 이명박 11,492,389 (48.7%) 당선

6.2. 국회의원 선거

연도 선거명 지역구 (비율) 비례대표 (득표율) 총 의석 (비율) 결과
2000년 16대 112 / 227 (49.3%) 21 / 46 (39.0%) 133 / 273 (48.7%) 원내 1당
2004년 17대 100 / 243 (41.2%) 21 / 56 (35.8%) 121 / 299 (40.5%) 원내 2당
2008년 18대 131 / 245 (53.5%) 22 / 54 (37.5%) 153 / 299 (51.2%) 원내 1당

6.3. 지방선거

연도 선거명 광역단체장 (비율) 기초단체장 (비율) 광역의원 (비율) 기초의원 (비율)
1998년 2회 6 / 16 (37.5%) 74 / 232 (31.9%) 244 / 616 (39.6%)
2002년 3회 11 / 16 (68.8%) 155 / 232 (66.8%) 467 / 682 (68.5%)
2006년 4회 12 / 16 (75.0%) 165 / 230 (71.7%) 557 / 733 (76.0%) 1,621 / 2,888 (56.1%)
2010년 5회 6 / 16 (37.5%) 82 / 228 (36.0%) 287 / 762 (37.7%) 1,247 / 2,888 (43.2%)

7. 각종 논란

한나라당/논란문서 참조.

8. 그 외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당 이름을 패러디한 듯한 핵나라당이 나오기도 했다. 핵나라당의 대표는 '정희원'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실제로 출마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만든 공보가 뭔가 허경영스러워서(...) 인터넷에서 유머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분이 돌아온다!! 핵.나.라.당!

수 많은 멸칭을 받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창의적인 방법으로 뇌물을 받은 2002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 이후 차떼기당 이라고 불리우며, 한나라당을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사람들은 가끔씩 이 멸칭을 사용했다. 이외에도 어감상의 이유와 친일파재산환수법 100% 반대 등으로 인해 딴나라당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83]

8.1. 성소수자 문제의 스탠스

미국공화당보다 강경하다. 동성애를 비롯한 차별 금지 법안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다. 정확히 말하면 동성애에 대한 증오발언을 하는 보수정치인들은 많지 않으나, 사회적 반대를 무릅쓰고 동성애 차별 철폐를 외치는 정치인들은 별로 없고, 보수 정치인들은 거의 아예 없다. 동성결혼DADT까지 사실상 모든 것을 다 인정한 미국 공화당보다도 훨씬 강경한 입장. 적어도 공화당은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미국에서 성소수자를 2등 시민으로 만들자는 발언을 할 수는 없다. 과격한 발언으로 유명한 트럼프조차도 동성애 반대 같은 발언은 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한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보수적이고 성소수자 유권자의 힘이 미국에 비해 크게 약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성소수자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정치 주도권을 잡을 수 있고, 특히 보수정당을 먹여 살리고 지지하는 보수 유권자들이 성소수자를 썩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수 정당의 지지자들이 대체로 덜 개방적이고, 보수적인 고연령층인 것도 있고,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들도 또한 겉으로 나쁜 말은 안해도 "동성애 존중은 하는데, 강요좀 하지 마라. 우리도 동성애자에게 이성애를 강요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기 때문이다.[84]

2007년 당시 이명박 후보는 동성애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는데도 당선되었다. 미국이었다면 난리났겠지만, 한국은 성소수자 유권자들과 얼라이들의 세력이 약해서 별 영향이 없었다.

9. 관련 문서


[52] 단일지도체제에서의 당 대표이다.[53]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54] 당시 최고의원은 박근혜, 원희룡, 김영선, 이강두, 이규택.[55] 박근혜 대표가 커터칼로 피습당하면서 대표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 또한 차기 대선 출마를 위해서 박근혜 대표가 당규에 따라서 사임한 것도 있다.[56] 저거 어떻게 쥐어박고 싶었어로 유명한 대표다.[57] 이 당시 박근혜는 당권장악을 위해서 민정계 출신의 강재섭을 지원했고 이명박은 자신의 최측근인 이재오를 지원했다. 결국 강재섭이 대표가 되었다.[58] 당시 최고의원은 강재섭, 이재오, 강창희, 전여옥, 정형근 이었다.[59] 경남 양산시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로 사직[60] 당시 최고의원은 박희태, 정몽준,허태열, 공성진, 박순자(여성)이었다.[61] 당시 친박계는 허태열을 지원했으나 친이계가 주류가 된 상황이었기에 6인회의 좌장인 박희태가 유리했다.[62] 지방선거 패배로 사직.[63] 박희태의 사직으로 차순위인 정몽준이 승계받았다.[64] 당시 당 원내대표였다.[65] 보온병을 폭탄으로 착각한 그 분 맞다. 인천시장을 지냈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며, 민선6기 경남 창원시 시장을 지냈다.[66] 당시 최고의원은 안상수, 홍준표, 나경원, 정두언, 서병수이다.[67] 국회부의장직을 겸임했다.[68] 이후 2017년 7월, 한나라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의 대표를 맡게 된다.[69] 당시 최고의원은 홍준표, 유승민, 나경원, 남경필, 원희룡이 당선.[70] '친이계는 홍준표를, 친박계는 유승민을 지지하는 구도였다.'고 이전에 기술되어있었는데, 친이계가 민 것은 원희룡이었다. 홍준표는 당시 계파색이 옅은 사람이라 특정 지지층이 없었다. 이 때문에 홍준표는 원희룡에 반대하는 캐릭터로 친박계의 2등표를 모으는 전략을 사용했다.#[71] 딱히 존재감이 없던 유승민이 오로지 친박계의 힘으로 2등을 차지하고, 홍준표가 당 대표가 된 데 반해, 친이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원희룡이 4등에 그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심화됐다.'한나라당, 계파 해체 신경전‥친이계 '허탈''[72] 원내대표 겸임. 이후 새누리당으로 바뀌고서 당대표.[73] 새누리당으로 당명 개정.[74] 홍사덕 의원까지가 원내총무 칭호 사용.[75] 김덕룡 의원부터가 원내대표 칭호 사용.[76] 당명 개정 이후에도 원내대표직 역임. 2012년 5월 8일에 공식임기 종료.[77] 대표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핵심 멤버인 김부겸, 김영춘이나 이부영, 이우재, 충남지사 후보로 출마한 양승조[78] 단 상도동계 중에서도 서청원과 김무성은 박근혜를 지지했다.[79] 이들은 대부분 친박에 속했다.[80] "독고다이 정치인"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고 친이계의 지원을 업어 당대표로 취임하는 등 엄연히 친이계의 일부로 보는게 맞다.[81] 이명박 대통령 탄생에 기여한 정두언을 친이계로 안 보듯 이 때 홍준표와 이명박 대통령의 사이도 썩 좋지 않았다. BBK 저격수임에도 불구하고 법무부 대신 환경부 장관을 제의했기 때문이다. 홍준표는 이 당시 친박에 가까운 무계파로 분류되었으며, 당 대표도 친이계가 아닌 사실상 친박계의 묵인으로 될 수 있었다.#[82] 김문수, 안상수 등이 경선에 출마하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박근혜의 대항마가 될 수 없었다. 인지도나 정치 기반부터가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83] 실제로 2006년 말에 충남의 어느 고교에서 2학년 2학기 기말고사 문제로 출제되기도 했다! 이에 전여옥 의원이 이를 질타하기도 했다.[84] 민주당 지지자들도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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