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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支刀 / 六叉の鉾[1]
목차

1. 개요
2. 문구 해석을 둘러싼 역사적 분쟁
2.1. 칠지도는 중국에서 만들어서 일본에 하사했다?
3. 각종 매체에서의 칠지도
3.1. 한국
3.2. 일본

1. 개요


백제에서 왜나라에 하사한 보검이다. 일본 나라현 덴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전해져 오는 철제 으로, 1953년에 일본의 국보 고고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검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기괴한 모양으로 뻗은 잔가지가 특징이며, 길이는 74.8 cm이다. 도신에는 한반도 금관문화의 금상감 기법으로 황금문자 62자를 수놓은, 당시 기준으로 최고의 금속 공예기술이 들어간 보검이다.

특유의 복잡한 구조 형상으로 미루어 한 눈에 봐도 전투용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보배임을 알 수 있다. 칼자루에서부터 칼날에 이르기까지 형상은 나무 모양인데 이것은 신성한 나무로, 제사의 주관자를 상징한다. 또한 7갈래 가지는 북두칠성을 본 뜬 것으로 한 나라의 화복을 다스리는 군주의 통치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2]

말 그대로 제사와 통치를 모두 주관하는 군주의 증표이자 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각 나라 군주들 사이에서는 정교하게 제작한 보검을 선물로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대체적으로 대국의 통치자가 그보다 작은 나라에 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용천지역에선 명나라 영락제가 티벳의 달라이라마에게 선물한 보검을 복원한 모조품을 전시했다. [3]

신검 전설에 소개된 칠지도 본문. 저 책 자체가 일본 책이라 아래 해석과 다르다.

칠지도 자체는 일본에 딱 한 자루만 있지만, 현대에 들어 사학자들은 한반도에서도 양식이 비슷한 보검들을 발굴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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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제시기 부여 군수리 사지에서 발굴된 철제 칠지상 철기. 문화재청 부여 군수리 사지 페이지에는 칠지도가 발굴되었다고 나오는데, 이 유물을 말하는 듯하다.

2. 문구 해석을 둘러싼 역사적 분쟁

글씨 몇 자가 훼손되었기에 이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학계 간 의견차가 있다. 일본 학계는 보통 백제 근초고왕으로 예상되는 인물이 일본에 바쳤다고 하고,[6] 반대로 한국 학계는 백제의 근초고왕으로 예상되는 인물이 당시 태자였던 근구수왕을 외교사절로 보내서 하사했다고 여긴다. 왕위계승자를 사절로 보낸 점도 있어서, 쌍방의 견해가 상당히 충돌한다.[7] 그러나 근초고왕이 보낸 것이 맞다고 가정할 경우, 이시기 백제는 한반도는 물론 중원 세력에게도 상당한 우세를 점하던 고구려와 경쟁할 정도로 전성기를 맞이한 나라였다. 반면 일본은 백제에게 전수받은 기술들로 야만을 벗어나 문명을 이룩한 단계였다. 따라서 백제가 일본에게 칠지도를 바쳤다는 주장은 당시 정황상으로 봐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편, 건국대 홍성화 교수는 자신의 논문 《석상신궁 칠지도에 대한 일고찰》(2009.12.)에서, 전지왕 대에 고구려의 남하를 막기 위해 전달했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다만, 전지왕은 고구려에 대해 수성적인 입장을 취했다. '병오 정양'이라는 표현을 단지 '양기가 강한 때에 만들었으므로 좋은 칼이다.'는 의미에 불과하다고 해석하는 쪽에서는, 칠지도가 정말로 태화 4년 11월 병오일에 만들어지진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다. 그러나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다. 조경철은 논문에서, 당대에 관용적으로 쓰이던 표현인 '丙午日中'을 사용하지 않고 굳이 '丙午正陽'이라고 쓴 것은 백제의 왕이 이 문구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고 있음을 뜻하며, 칠지도를 만든 연대도 실연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일본 역사학계에서 근거로 주장하는 《일본서기》는 한일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이며, 한국 학자들도 종종 참고한다. 한국에는 그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서가 전혀 남아있지 않으므로, 일본서기만큼 삼국시대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서술한 다른 문헌이 없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야마토 정권의 공식적인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저술된 역사서이기 때문에, 덴노 중심주의와 일본 중심주의적 기술이 너무 많아 객관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예컨대 칠지도가 몇 년도에 일본으로 들어왔는가에 대한 기록이라면 특별히 의심할 이유가 없는 한 일본서기가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백제가 일본에게 '하사한' 것인지 '바친' 것인지와 같은 정치적 입장 문제에서는 《일본서기》의 신뢰도가 그리 높지 않다. 이러한 문제로 양국 학계에서 해석의 차이로 논쟁 중이지만, 당시 백제가 일본에 조공할 이유나 근거가 떨어지기 때문에 한국에선 신뢰성을 의심하는 학자들이 많다. 게다가 한국 사학계 측에선 칠지도에 적힌 문구도 중요하게 보고 있는데, 일단 아래는 칠지도 문구 원문이다.

앞면: 泰○四年十○月[8]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銕)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학자마다 판독을 다르게 하는 글자는 괄호 안에 나타내었다. 이것의 구체적이고 정확한 해석은 학자마다 이견이 많기에 정설은 없으나, 큰 틀 안에서는 대강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태○ 4년 1○월 16일 병오정양에 백 번이나 단련된 철로 된 칠지도를 만들었다. 모든 병해를 피할 수 있으니 마땅히 공손한 후왕에게 줄 만하다. ○○○○이 만들었다.
선세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으니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고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


《이십사삭윤표》에 따르면, 칠지도의 제작연도로 흔히 알려진 369년(기사년) 5월 16일, 11월 16일, 12월 16일은 각각 을미일, 임진일, 임술일이다. 뒤에 나오는 병오일과 맞는 날이 하나도 없다.


여기서 '마땅히 공손한 후왕'이라는 구절이 한국 사학계가 중요시하는 부분이다. '후왕'의 '후(侯)'는 보다 하위에 있는 신하를 지칭하는 글자로 보통 '제후'와 같은 낱말에 쓰이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부 일본 학자들은 백제가 아닌 동진에서 만들어서 단순히 백제를 거쳐 동진 → (백제) → 일본 형식으로 하사됐다는 설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후술되어있듯 근거가 빈약하긴 하다. 즉, 현대의 논쟁이나 후왕의 속뜻이 어떤 것이었건간에 당시 백제 왕실은 일본 왕실을 '후왕'이라고 부른 모양이다.

칠지도와 관련하여, 백제가 왜에게 '인질'을 보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인질을 보낼 정도면 칠지도도 솔직히 바친 거라 봐야 하지 않나?' 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칠지도와 직지가 왜로 건너간 것은 서로 시대적 간극이 길어서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더군다나 백제가 보냈다는 인질에 대해서는 속까지 파고 들어가봐야 한다. 정작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 하는 백제삼서의 기록과 '내조하였다.' 하는 일본 쪽 기록만 있지, 어디에도 인질을 보냈다고 하진 않는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도 '인질'이라는 표현은 없고, 정작 한참 후대인 고려시대에 쓰인 삼국사기 이런 표현이 나올 뿐이다. 문제가 되는 삼국사기조차도 해당 구절을 살펴보면 결호(結好)라고 하여 상하관계에 따른 인신공납이 아닌 단순히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인질(質)의 의미도 상하관계와 무관함을 밝히는 견해들이 나행주를 필두로 제기되어 설득력을 얻었다. 신라중심사관 의심도 받는 삼국사기라 백제는 낮게 보았을지도

덴쇼 14년(1586)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어머니인 오만도코로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냈지만 당시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굴복을 선언한 것이 아니듯, 당대 인질이란 의미가 지금과 같이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일본의 금속, 철기 제작기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스즈키(2013)는 2013년 세계대백제전 기념학회에서 백제의 금속기술을 다루면서 칠지도에 대한 중요한 지적을 했다. 바로 칠지도는 명문에서 말하는대로 '단련', 즉 '단조'된 것이 아니라 '주조'되었다는 것이다. 칠지도의 형상을 단조하는 건 초고난이도 작업이며, 칠지도 단면도 단조했을때 나올 수 없는 길게 눌린 타원형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본다면 명문의 날짜나 수식어구를 그대로 해석할 이유는 없어보인다. 따라소 병오정양이든, 백번 단련이든 그냥 하나의 좋은 미사여구를 갖다붙인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

주보돈은 2011년 한국고대사연구의 『백제 칠지도의 의미』라는 논문에서 하사했느냐 바쳤느냐를 따지는 것은 '소모적인 논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칠지도의 태화(太和)를 백제의 연호로 보고 그 원년을 369년으로 추정하였다. 369년 근초고왕이 황색 깃발을 사용하여 한강 남쪽에 사열을 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참고하였는데, 굳이 천자의 색인 황색 깃발을 사용한 것은 연호 사용과 관련이 깊다고 보았다. 게다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의 가라 7국 평정기사를 주체교체론 입장에서 받아들일 때, 백제는 가라 7국을 평정하고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했으며 일본과 관계를 텄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해 고구려의 침략을 물리쳤다.

따라서 백제는 사방을 평정했다는 자신감으로 고구려에 대항하여 황색 깃발을 사용하여 열병하는 등, 자신감을 드러낸 해였다. 그래서 이 해를 태화 원년으로 정하여 사용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칠지도가 제작된 것은 태화 4년으로,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완벽하게 우위를 점하고, 심지어 평양성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왕을 패사시켰을 정도였다. 이에 동진은 근초고왕을 영낙랑태수로 봉하는데, 낙랑태수라는 직책이 4세기 초반까지 한반도 주변을 아우르던 국가에 중국 왕조가 주던 실질적인 직책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동쪽의 패자로서 근초고왕을 인정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백제는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칠지도를 제작하여 일본에 선물하였는데, 따라서 백제 칠지도로 드러난 양국 간의 상하관계와 같은 현대 양국의 자존심 싸움으로 비화되는 지리멸렬한 소모적 논쟁 이전에, 당대 백제의 자신감이 드러난 칠지도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자는 주장이다. 근초고왕 업적을 낚아챈 것 아니냔 의심을 받는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의 가라 7국 평정기사, 침미다례 도륙기사의 사실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실물유물로 파악한 것이다.

2.1. 칠지도는 중국에서 만들어서 일본에 하사했다?

당시 칠지도는 백제가 아닌 중국 동진에서 만들어 그것을 백제를 통해 일본에게 하사한 형식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다시 지리한 논쟁 1966년 구리하라 도모노부(栗原朋信)의 <칠지도의 명문에 대한 일해석>에서 주장한 일명 동진 하사설인데, 백제와 일본 사이에 뜬금없이 중국를 끼워넣은 이유는, 백제가 중국 동진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주장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문장의 태□(泰□)를 태화(泰和=太和)라고 보고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백제가 동진의 연호를 쓰는 동진의 속국이며, 칠지도는 중국의 동진 왕조가 백제왕에게 왜왕을 통하여 하사하라는 명령을 받아 전달한 물건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근거가 빈약한 비현실적 주장이라는 반론도 많은게, 일단 ‘太’와 ‘泰’가 엄연히 다른 글자임에도[9] 泰○四年를 중국 동진의 연호 太和 四年(369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 물론 전근대 한국의 외교와 관련된 부분에서,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 사실상 표준으로 쓰이던 기년인 중국 연호를 쓴 사례가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 백제 무령왕릉과 그 묘지석의 발견으로 백제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동진백제로 하여금 일본에 하사하도록 지시했다면, 중국 측 기록에도 일본에 대한 하사 기록이 있어야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중국이 만들었다면 칠지도 자체에도 중국이 주체로 언급되어야 되는데, 그런 사실을 의미하는 문구는커녕 동진을 암시하는 문자가 하나도 없다. 또한 중국에서는 비슷한 양식이 출토된 적이 없으나, 한반도에서는 칠지도의 근간이 되는 원삼국시대의 금관양식이 지속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애초에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양식의 금은동의 물건들 자체가 한반도 고대왕조들의 오리지널리티라는 것. 그렇기에 연호 하나만 가지고 중국에서 만들었다느니 하사했다느니 하기에는 그 근거가 너무나 부실하다. 문서 상단의 원삼국시대 유물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그냥 당대 양식만 보면 답이 나온다.

또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손치더라도, 후왕이라는 호칭 등으로 보아 일본과 중국은 당대부터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다는 것인데, 문젠 몇 백 년 뒤에 쇼토쿠 태자가 중국 입장에서 보면 거만하게 "해 뜨는 나라의 천자"라는 외교문서를 보냈다가 수 양제가 일본 사신을 죽이니 살리니 할 정도로 분노했던 사건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다른 방면에서 바라본 주장도 있다. 후왕 바로 다음에 나오는 한자들이 보이지 않아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 그런데 한문한국어일본어와는 서기 방식이 반대라 그렇게 보면 해석이 꼬여 이 부분이 문장 전체가 큰 효력을 잃는다. 후왕을 단지 길상구로만 받아들여 '선량한 후왕'식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책에도 이 설을 따르는 경우가 있다.

동진 하사설과 관련해서 전문적으로 알고 싶은 위키러가 있다면, 2009년 나온 학술논문 石上神宮 七支刀에 대한 一考察을 참조하기 바란다. 위키 본문의 내용은 해당 논문의 내용을 극히 압축해 놓았으며, 간단히 알아보고 싶다면 여기 참조.

3. 각종 매체에서의 칠지도

모양이 특이하고 일본 고대사의 한 아이콘이 된 것 때문인지, 일본에서는 여러 매체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헬게이트 런던에도 나온 바 있고, 어느 온라인 게임에서는 불 속성의 검으로 나오기도 했다. 물건너의 여러가지 게임이나 매체에서 뭔가 굉장한 무엇인가로 등장한다. 신화의 캐릭터가 사용하기도 한다.

3.1. 한국

  • 리젠드의 주된 소재이기도 하다. 근데 단행본에 의하면 연재 당시 독자들의 반응이 가관이었는데, 칠지도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 묻는 독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작가도 어이가 없었는지 단행본에 '칠지도는 교과서에도 나온다'고 명시했다.

  • 만화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 지역랭킹 1위로 나오는 영미의 몬스터 딥다크몬이 쓰는 무기가 칠지도와 매우 흡사하다

  • 드라마 근초고왕의 마지막회에서 근초고왕이 왜국에게 칠지도를 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 게임 바람의 나라에서 이벤트로 획득할 수 있는 기간제 무기로 나왔었으며 백제 업데이트 이후 퀘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사실상 백제 전설무기급으로 등장한다.

  • 드라마 서동요의 오프닝에서는 무왕이 칠지도를 든 모습이 나온다.

  • 소설 퇴마록의 국내편 중 '초치검의 비밀'에서는 닭우에게 왜를 정벌하라고 하사한 칼이라는 설정이 나온다.

  • 만화 보물찾기 시리즈 중 일본에서 보물찾기의 주 소재는 바로 칠지도이다. 일본에서 찾아야 할 보물도 바로 누군가가 조각내어 잘 보존시킨 또 하나의 칠지도. 봉팔이는 이 칠지도를 야쿠자에게 넘겼다가 지팡이에게 매국노 소리를 듣는다.[10]

  • 천년의 신화에서는 근초고왕이 들고 다니면서 적군을 썰어버린다. 다른 본영 국왕 영웅과 큰 차이는 없다. 순 외형 차이뿐. 하지만 남들이 밋밋한 그냥 검을 들고 다닐때 은근히 뽀대는 난다. 여기서도 검을 휘두르기 보다는 찌르는 공격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백제의 본영인 남당 입구 옆에도 한 자루가 놓여 있다.

  • 천년의 신화 2에서는 후손인 의자왕이 금색의 칠지도를 들고 다닌다. 근데 옆의 가지가 2개뿐이다. 뭐지 이건?

  • 임진록2+ 조선의 반격에서는 검을 사용하는 영웅 유닛이 장착 가능한 무기 아이템으로 '쿠사나기의 검'이라는 아이템이 등장하는데, 생긴 건 영락없는 칠지도이다.(뭥미?) 성능은 공격력을 45% 정도 상승시켜주는데...같은 검 아이템인 청홍검공격력 100% 증가 + 일정 확률로 일격필살[11]이라는 멋진 옵션을 가지고 있어서 쿠사나기의 검은 버림받는다. 사실 이건 폭마혈도나 용비늘검 같은 개성 강한 몇몇 검을 제외한 대부분의 검들이 같은 처지...

도신의 양쪽에는 사슴뿔을 본뜬 가지가 3개씩 달려있고 도신의 양면에는 61자의 명문(銘文)이 금으로 상감되어 있는 붉은 빛의 무기.
길이 0.75m, 무게 1.3kg, 공격방식 불명
장착 시 강력한 2연타를 날릴 수 있는 스킬인 '홍련'을 쓸 수 있다. 그런데 후반에는 어척검도 생기고, 데미지는 다른 무기로 인해 강해져 있으므로 이내 버리는 무기가 된다.


  • 헬퍼에서 흑조가 카제모노에게 칠지도를 내려 존나나 워통거를 막는데 사용됐다. 워통거가 너무 먼치킨이어서 실패했지만.


  • 네이버 웹툰 나이트런 - EX 오프닝 75화 마지막 컷에서 세븐이 산반술사 당주 인증 후에 소환한다. 이 때의 칠지도의 모습은 기존의 것과는 다르다.

  • 웹툰 신을 죽이는 방법에선 화랑이쓰는 신살구 열쇠검의 7번검으로 포획과 수렵에 특화되어 있다.

3.2. 일본

일본에 보관되어 있다보니, 일본 매체에 자주 등장한다. 다만 칠지도 자체로 나오는 경우보다는 토츠카노츠루기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 등의 고대의 성검을 그려넣을 때 그 모양을 칠지도처럼 그려넣은 경우가 많다. 또한 칠지도를 다루는 일본 매체에선 보통 고대의 신비로운 검이란 무기 이미지를 강조하지, 한국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없는 편이다.





  • 그림노츠에서 나오는 레어 양손검으로 등장. 이름도 대놓고 칠지도다. 뭔 우연의 장난인지 캐릭터 체인지라는 요소를 공유하는 전국전승에서도 초기작 최종결전때 칠지도스러운 검이 사용되었다.


  • 디스가이아에서도 검 계열 무기 중 꽤 강한 축에 속하는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 PS1판 닌자잠입액션게임인 '입체닌자활극 천추'에선 최종보스가 쓴다. 최종보스가 쓴 무기인 만큼 당연히 데미지가 장난 아니게 아프다.


  • 별의 커비 시리즈에서, 메타 나이트가 보검 갤럭시아라는 이름의 금색 검을 들고 다닌다. 초창기 삽화에는 칠지도였는데, 설정상으로만 칠지도가 작중 스프라이트는 표현력의 한계로 그냥 칼로 나왔다. 3D 모델링을 사용하기 시작한 별의 커비 Wii 이후로는 제대로 칠지도 모양으로 표현되는데, 이때 어째 옆날이 6개가 아니라 4개로 변경되었고, 이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의 그림자(?)인 다크 메타 나이트도 비슷한 모양의 다크 갤럭시아 라는 은색 검을 들고 있다. 근데 옆날이 4개로 바뀐 원본과 다르게 이쪽은 트리플 디럭스에서 옆날이 6개인 검을 들고 나왔다.

  • 사가2 비보전설에서 숨겨진 레어무기로 등장. 라스트 플로어인 천계의 신전 최하층에서 가끔씩 랜덤등장하는 중보스 하니와(埴輪)[12]를 잡으면 극소확률로 드랍한다. 7히트 판정으로 위력은 절륜하여 힘80이상인 경우 4자리수데미지가 왕왕 뜨지만 역시 공격소비회수가 7밖에 되지 않는다.[13]



  • 소년탐정 김전일의 천둥축제 살인사건 편에서 천둥 축제를 위해 번개를 부르는 도구로 17개의 나무에 설치되었다.



  • 신라만상 쵸코에선 시리즈 초대 주인공인 '사이가'의 무기였던 이후로, 작중 주인공이나 주요인물들에게 쓰이고 있다.




  • 히미코전 코믹스에서 주인공이 각성하면서 소환하는 무기가 이와 비슷하게 생겼다.

  • 고전 인기만화 공작왕에서는 강력한 마물을 일격에 끔살시키는 아이템으로 한 차례 등장했다.


  • 다크 클라우드2에서 모니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검으로 등장한다. 영문판 이름은 7 Branch Sword. 그런데, 외형상으로는 갈퀴가 5개만 달려 있어서 칠지도가 아니라 육지도(...) 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무기 정보 링크

  • 파이널 판타지 11에서 플레이어가 사용 가능한 무기로 등장한다. 일본판 이름은 七枝刀, 영문판 이름은 Nanatsusaya 이며, 여기서 스샷을 볼수 있다.


  • 포켓몬스터의 전설의 포켓몬 레쿠쟈의 메가진화형인 메가레쿠쟈의 눈가에 그려져 있는 문양의 모양이 거의 칠지도다.

  • 쿠루마다 마사미 선생의 풍마의 코지로의 성검전쟁편의 적측의 성검중 한 자루로 등장.처음에는 압도적인 위력을 보이지만 쿠루마다 스토리 답게 주역 파워로 밀리면서 가지가 하나 둘 부러지면서 마지막에는 다 부러지고 사용자도 패배한다.

  • 2013년작 배틀물 에로게 환창의 이데아의 주인공 유마의 검이 영락없는 칠지도이다. 그리고 매우 크고 아름답다.



  • 모바일 게임 하얀고양이 프로젝트에서 3성 검사 무기들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4성 아닌 2, 3성 무기들은 무기스킬도 없고 오토스킬 구성도 최악이기 때문에 뜨면 바로 갈아버린다(...).

  • 만화 블리치의 등장인물 히나모리 모모의 참백도가 칠지도와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다만, 갈퀴는 3개만 달려 있다.


[1] 일본어 독음은 각각 시치시토(しちしとう), 로쿠사노호코(ろくさのほこ)이다. 아무래도 베는 것은 힘들어 보이니 ''라기보다는 창의 일종인 ''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명문이 드러나기 전까지 이소노카미 신궁에서는 육차의 모(六叉の鉾)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적절하지 않은데, 형태상으로는 전혀 '모'로 분류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모는 나무로 된 대(손잡이)를 날에 끼우는 것이고 창은 창날의 슴베를 나무로 된 대에 박아서 고정시키는 것인데, 칠지도는 손잡이를 끼워넣을 투겁이 아닌 손잡이에 끼워넣을 슴베가 달렸으므로 '모'로 볼 이유가 전혀 없다. 더구나 슴베의 형태도 창날보다는 칼날 쪽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에 칠지도(七支刀)라는 이름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실제 사용할 일이 없는 상징적인 물건이니만큼, 모양이 실용적이지 않다고 해서 검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칠지도란 명문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일본에서도 '칠지도'라고 함이 일반적이다.[2] 북두칠성은 음양과 오행을 모두 담고 있는 하늘의 중심 별자리로, 인간의 모든 길흉화복과 수명을 주관한다. 따라서 북두칠성은 자연히 천명을 받아 천지공도를 인간세상에 펼치는 제왕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별자리다. 그래서 중국의 통치자들은 예부터 보검에다 칠성을 새기는 일이 많았다. 시진핑의 보검에도 북두칠성이 새겨졌다.[3] 모조품이라고 해도 최상품 철과 황금과 마노 등 귀금속으로 제작하여 가치만으로도 60만 위안에 달하는 초고가품이다.[4] 칠지도와 같은 기법이 나타나는 원삼국시대의 환두대도 유물은 무쇠, 금동(金銅)제를 가리지 않고 고루 출토되었다. 다만 특유의 금상감기법이나 제조법이 동일할 뿐 모습까지 칠지도와 똑같지는 않다. 링크, 또 다른 링크.[5] 사진 출처 기사: 일제 때 출토 미공개 유물 15만 점 박스째 보관.[6] 그래서 일본사 교과서에도 헌상(献上)이라 쓰였다.[7] 일본 학계는 칠지도를 들고온 사절이 근구수왕(당시 태자)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백제를 왜의 속국으로 인식하고, 한국 학계는 격이 낮은 쇠로 만든 유물이며 후왕이라는 문자를 들어서 왜가 백제의 제후국이었다고 인식한다. 어찌되었든 당시 백제와 왜가 상당히 우호적 관계였음은 분명하다.[8] 종래에는 ○月로 알려졌고 五月로 판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1981년 NHK에서 엑스레이 판독을 한 결과, 이것이 十○月이라고 나타났다. 11월 16일 또는 12월 16일의 간지가 병오인 해를 4~6세기에서 찾아보면, 408년(전지왕 4년), 439년(비유왕 13년), 501년(무령왕 원년), 532년(성왕 10년) // 431년(전지왕 9년), 537년(성왕 15년), 563년(위덕왕 10년), 594년(위덕왕 41년)이 있다. 그중 가장 개연성이 높은 해는 전지왕 4년(408)이고, 따라서 이 ○月은 十一月로 판독함이 옳다.[9] 太와 泰는 뜻이 서로 통하는 통자(通字)이긴 하지만, 엄연히 다른 글자다. 물론 어려운 한자에 대응하는 쉬운 통자로 대체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칠지도 명문의 경우 그 반대로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적절치 않다.[10] 심지어 자기 부하들인 쟝과 얀센도 처음에 그런 계획에 대해서 아무리 그래도 매국노 짓을 하겠단 말이냐며 격렬히 반대했다(...) 물론 봉팔이는 돈도 챙기고 그 칠지도를 한국에 줘서 명예도 챙길 계획이었지만[11] 순간적으로 비정상적인 높은 공격력을 내는데, 유닛은 즉사이고(지상 유닛들 중 이 공격력을 넘어서는 체력을 가진 존재가 없다! 굳이 꼽자면 백설산삼 왕창 먹여서 체력을 다섯자리로 늘려놓은 영웅 정도...근데 그건 사실상 치트키 아니면 꿈의 플레이에서나 가능하다) 건물도 죽을둥 살둥 하는 처지로 만들어버린다.[12] 전체공격 지진, 플레어를 다용하는 초강적으로 신전 지하에서 유일하게 도망이 가능한 전투(즉, 일반 자코전에서는 도망칠 수 없다!)[13] 공격회수 한계설정으로 무기가 철저히 소모품인 사가2에서 엑스칼리버는 무제한(!). 디펜더, 선블레이드, 무라마사 등 최상급 무기들은 소비회수 40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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