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로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창업주이다. 호는 금호(錦湖)이다. 다시 말해서, 그룹의 명칭은 바로 그의 아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참고로 그의 이름은 인천광역시와는 전혀 무관하다. 박인천의 이름은 한자로 쓰면 朴仁天이고, 인천시는 仁川이다.[1]

친일인명사전에는 올라와 있지 않지만, 택시 회사를 설립하기 전 경찰 간부(경부)였던 고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2. 생애

1901년 7월 5일,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신곡리(舊 나주군 죽포면 동산부락 신기마을)에서 태어났다. 1920년 나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광주부에 나와 목화 장사를 시작하였으며 이어 잡화상을 시작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 뒤 목포부광산군 송정리에서 장사를 하였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다.

이후 경성부올라왔다. 상경 후 오성강습소에서 5개월, 중동학교에서 3개월을 수학하였다. 그 후 무작정 일본 유학을 갔다가 3일(...)만에 다시 귀국했다. 연이은 사업 실패 후 순사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였다. 이어서 보통문관시험에도 도전해 5년 만에 합격, 순사부장이 되었고 경부까지 진급했으나, 광복 두달 전에 우연한 일로 경찰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태평양 전쟁에서 연패하고 있는 일본군 기사를 읽고 "이러다가 일본이 정말 패망하는거 아니야"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을 일본인 형사가 우연히 듣고 상부에 보고하는 바람에 파면되고 만 것. 하지만 이렇게 파면된 덕분에 광복 후에 반민특위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는 행운을 얻었다. 왜정 시절 경찰직을 역임한 사람은 반민 특위에서 최우선 처벌 대상이었고, 줄줄이 재판을 받고 교도소로 갔었다. 특히 박인천은 일반 순사도 아니고 간부였기 때문에 파면되지 않았다면 중형을 선고받았을 운명이었다. 훗날 박인천은 "일정 시절에 경찰에서 파면된 덕분에 광주고속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반민 특위에 잡혀들어갔었더라면 평생 광주고속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광복 후 박인천은 순사 시절 친분을 쌓아둔 지주들에게 돈을 빌려 1946년 4월 중고 미제 택시 2대를 구입하여 택시 사업을 시작했다. 1948년에는 2개 노선(광주시-장성군, 광주시-담양군)의 면허를 얻어 버스운수업을 시작하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가 건설되자 고속버스 사업에 뛰어들어 '광주고속'을 설립했다.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된 1971년 당시 처음에는 재향군인회 및 군 간부 출신 인사들을 앞세워 설립된 중앙고속이 처음에 서울 및 호남 노선에서 강세를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고속이 호남-서울 노선의 1인자로 부상하면서 전체 고속버스 시장을 하게 되었다.

당시 중앙고속이 운용하던 버스들은 미국 대륙을 횡단하던 그레이하운드사의 버스들이라 좌석이 더 넓었으며, 비록 중고였을지언정 매우 튼튼했다고 한다. 광주고속은 버스 성능면에서는 열세였기 때문에, 고객의 안전을 위해 서행한다는 문구를 내세웠으며, 그 대신 거친 도로를[2] 달린 자사 버스들을 어떻게 해서든 그 다음날 아침 전까지 정비를 완료해 다음날 투입해 회전률을 유지하거나 늘리는 방법으로, 시장을 잠식해나가기 시작한다. 게다가 '광주고속'이라는 상호 덕분에 호남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당시 광주 시민들이 곧장 타고 갈 수 있는 다른 회사 고속버스를 마다하고 30분 이상씩 기다려 가면서 광주고속만 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지역에서 이런 경쟁우위를 보인데다 당시 서울로 상경한 호남 주민들을 단골(?) 고객으로 끌어들인 호재에 힘입어 광주고속은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3]

한편 박인천은 운송업에 이어 1960년대 타이어 제조업(금호타이어)과 건설업(금호건설)도 시작했다. 금호건설은 당시 건설 불경기 여파로 어려움을 겪다가 장남 박성용 대에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고, 삼양타이어(금호타이어)는 장조카 박상구[4]의 수완에 힘입어 당대에 시장의 강자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84년 별세했다. 작고 후 장남 박성용이 그룹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박성용은 회장직을 맡자마자 부실했던 금호건설을 당시 잘나가던 광주고속으로 인수시키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 건설업 적자를 만회했으며,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제2민항사로 선정된 아시아나항공을 취항하는 대형 호재를 맞이하는데 성공, 회사가 제2의 도약을 이루게 되었다.[5]

이후 차남 박정구가 성세를 이어나갔으며, 3남인 박삼구가 회장을 맡았으나 무리한 인수합병으로 그룹의 재무구조가 악화되면서 2009년과 2019년 그룹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광주광역시 금남로에 자택이 남아 있다.[6] 이 집은 박인천의 아내인 이순정 여사[7]가 생활하다가 2010년 사망한 뒤엔 금호그룹 문화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2018년 10월 '금호시민문화관'으로 명명하고 공원 겸 갤러리 형태로 자택을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3. 가계도


[1] 비슷한 케이스로 야구선수 백인천이 있다.[2] 90년대 들어 고속도로 구간 확장 후 1시간 생활권이 된 광주-광양 구간이 당시는 4시간 걸렸다[3] 금호고속 외에 당시 강원, 경기 지역 노선에서 우위를 보인 동부고속도 고속버스 사업을 바탕으로 대기업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다.[4] 부산저축은행 창업주. 성미가 급한 박인천 창업주를 보좌해, 구체적인 안을 만들고 성사시켰으며, 특히 삼양타이어(금호타이어)를 성장시킨 1등공신이었다고 한다. 박인천 사후 타이어 회사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박정구 등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호그룹 계열사 지분을 매각해 그라인더 회사를 운영하다 부산-경남 지역에서 금융업을 하였다. 2019년 4월 97세를 일기로 사망.[5] 때마침 건설 경기도 호황을 맞으면서 금호건설도 흑자로 돌아서게 되었다.[6] 나주에 있던 생가는 6.25 전쟁 때 파괴되었다.[7] 1910년생으로 2010년 5월 12일 향년 101세로 별세하였다. 생전에 큰아들과 둘째아들이 자신보다 먼저 숨을 거두는 비극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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