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식물
1.1. 개요
1.2. 상세
1.2.1. 국내
1.2.2. 해외
2. 전통 신발의 한 종류
3. 한국의 극단


1.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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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
Cotton이명:
Gossypium indicum Lam
분류
식물계
피자식물문(Angiospermae)
쌍자엽식물강(Dicotyledoneae)
아욱목(Malvales)
아욱과(Malvaceae)
목화속(Gossypium)
목화

1.1. 개요

木花.
쌍떡잎식물 아욱목 아욱과 한해살이풀의 총칭. 학명은 Gossypium indicum.

이것이 씨앗을 맺을 때 생기는 털을 이용해 무명천을 만든다. 씨앗으로는 기름을 짜는데, 면실유라고 한다. 시중에 파는 식용유 중에 있으며 한때 참치캔을 채우고 있는 기름이었다. 2017년 현재는 유채꽃씨유(카놀라유)로 대체.

덜 익은 열매는 먹을 수 있는데, 달큰한 맛이 다래와 비슷하다 하여 '목화다래' 또는 '실다래'라고 한다. 이 외에도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면화다래'나 '청면'(덜익은 )이라고 하기도 했다. 결국 뜻은 다 거기서 거기 다만 특유의 섬유질이 입 속에 많이 남기 때문에 식감은 좋지 않은 편. 그래도 단 걸 찾기 힘들던 1950~70년대 태생 어른들은 이런 걸로 군것질을 하곤 했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목화를 키우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1.2. 상세

역사상 가장 가치가 높은 비식량작물이다. 인류가 이용하는 동식물이 다 그렇지만, , , 옥수수같은 곡물류가 인간들이 먹으라고 진화한 것이 아니듯, 목화도 애초에 인간이 쓰라고 솜을 만들어내도록 진화한 식물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민들레처럼 씨앗이 바람에 날려가는 방식으로 퍼뜨리게 진화했다가 나중에는 씨앗이 바닷물 위에 떠다닐 정도로 빽빽한 솜털을 만들어냈다고 추측하고 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는 찰스 로버트 다윈이 발견한 '다윈의 목화'(Gossypium darwinii)라는 종이 자생하고 있는데 이 목화는 유전자를 대조해 본 결과 남미의 ELS종(Gossypium barbadense)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바람에 날리고, 해류에 떠내려오거나, 혹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목화 씨와 솜털을 갈라파고스 핀치들이 주워다 둥지 재료로 썼다는 설이 있다. 재미있는 건 이 ELS 종도 아프리카에서 대서양을 건너 왔다는 유전적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대륙인들이 퍼뜨린 것도 아닌 게,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목화로 옷과 카펫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

지력을 소진시키는 주요 작물 중 하나이다.[1]

섬유의 원료로만 쓰이는 것 같지만 의외로 현대에 와서는 원예디자인 쪽에서 장식용 소품으로도 쓰인다. 드라이플라워 등으로 가공해서 디퓨저나 꽃다발, 리스 등 각종 장식에 목화솜이 달린 줄기 전체를 쓰기도 할 정도. 이외에 향수 중에는 목화를 모티브로 한 '코튼향' 계열의 향수들이 있는데[2] '벚꽃향' 처럼 실제 식물의 향을 흉내냈다기보다는 그 식물의 이미지를 흉내낸 인공향에 가까운듯.

이 식물을 모티브로 한 환상종으로는 바로메츠가 있으며, 캐릭터로는 포켓몬스터엘풍백솜모카가 있다.

1.2.1. 국내

고려 시절 문익점원나라에서 이것을 가지고 온 것으로 유명했지만, 2010년 백제 시대의 면직물이 출토되면서 목화 도입의 원조를 내놓아야할 판이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목화는 온난하고 건조한 기후인 인도의 고원지대가 원산지인만큼 장마와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의 기후와는 잘 맞지 않아 극소수만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이런 희소성으로 인해 그 용도 또한 높으신분들의 사치품이나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당장 면직물 유물이 출토된 곳을 보면 절터란 걸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이나 귀족의 원찰이었다면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을 확률이 상당히 높아지는 것. 그러므로 동북아시아 기후에 맞게 개량된 퍼진 중국제 종자를 들여와 서민 계층에 대중화한 것은 여전히 문익점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 최초 타이틀은 내놓는 걸로 그리고 그 공로 덕분인지 조선 시대에는 공신으로 꼽혔다.[3]

다만 위인전에 나오는 것처럼 붓두껍에 숨겨서 목숨 걸고 가져온 것은 아니다. 문익점의 목화와 관련해서 3대 거짓 정보가 있는데, '중국의 강남으로 3년간 유배', '붓두껍', 그리고 '목화는 수출 금지 품목'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후손들이 점점 부풀린 케이스. 세종, 세조실록에서도 이 이야기는 많이 인용되고 있으니 전형적으로 성공한 사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서 강남 드립이라거나, 조선 건국에 부정적이라서 폄하당했다거나 하는 것이 왜 의미없는 이야기인지는 문익점 문서를 참고.

여담으로 비단을 중국이 독점하기 위해 누에의 밀반출을 금한 적이 있는데, 동로마 제국의 사신이 위의 일화처럼 지팡이 같은 곳에 숨겨서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 누에 재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목화 씨 밀반입 일화의 모티브가 되었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둘 다 직물 원료이기도 하고...

목화의 전래가 기존의 삼베옷보다 백성을 따뜻하게 해준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화로 만드는 무명천은 비쌌고, 조선시대에는 이 무명천으로 화폐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평통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조선의 기축통화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 일반 평민들은 겨울나기 옷 한두벌 정도밖에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화학솜 및 수입 목화와의 경쟁에 밀려 오늘날 국산 목화는 산업용 수준으론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국내 목화 농업은 조선 시대 때 일본에 수출까지 했었을 정도[4]로 기반이 있었고, 개화기 때 수입 목화가 들어오면서 한 번 타격을 받았으나 전쟁 물자 확보를 위한 남면북양 정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일제강점기까지는 계속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6.25 전쟁 크리로 당시 섬유 공업이 가장 발달해 있던 수도권이 초토화되고, 이후 미국의 원조로 대량의 미국산 원면이 들어오면서 사실상 목화 농업은 끝났다. 다만 목화 재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유기농 목화솜을 찾는 수요 때문에 소량으로 목화를 재배하는 농가들이 남아 있다.

혹시라도 자기 집에 옛날 어머님이 혼수품으로 가져온 진짜 국산 목화솜 이불 같은 게 있다면, 다시 구하기 힘든 물건이니 알아서 잘쓰자. 목화 솜은 오래 되면 뭉치기 때문에, 80년대만 해도 동네마다 이것을 얇게 떠서 풀어 주는 솜틀집이 있었다. 여기서 솜을 조금씩 빼돌리는 게 뉴스에 나오던 시절. 이런 이불을 덮던 사람들은 화학솜은 덮는 느낌이 안 나서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에는 재래시장에서 몇 곳이 잔존하는 형태. 이런 솜틀집에서 솜을 푼다고 손님들이 맡긴 이불에서 진짜 솜을 빼고 더러운 쓰레기 솜을 넣는 행위가 시사프로에 나오기도 했다. 구식 목화솜 이불의 경우 매우 두꺼워서 한겨울에도 덮기 힘들 때가 있는데, 이를 재활용해서 좀 더 얇은 봄/가을용 이불로 나눠 만들기도 한다.

조선영조가 왕비를 뽑는 시험을 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모두 장미, 모란 같은 꽃을 언급할 때 정순왕후 김씨백성을 따뜻하게 하는 목화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대답해서 왕비로 채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2.2. 해외

미국 남북전쟁의 원인이 된 흑인 노예 해방과도 관련된 작물. 당시 남부의 농장주들은 돈이 되는 목화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이 목화농사가 돈은 되지만 노동력을 너무나도 많이 요구하기에 학을 떼고 있었다. 돈 줘도 할 사람이 없기에 흑인 노예를 쓰고 있었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할 때부터 "모든 인류는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구절에 대해 남부 주들이 맹렬하게 반발했다.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초안은 대놓고 인류에 대한 범죄인 노예제를 미국에 들여온 영국 국왕을 까는 내용이 있었으나 마찬가지로 남부주 대표들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삭제되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미래의 후손들이 어떻게 하겠지" 정도의 입장이었다. 제퍼슨이나 조지 워싱턴처럼 본인이 대규모로 흑인 노예를 부리는 사례도 있었고, 개개인적으로는 흑인 노예제도를 극히 혐오했는데도 불구하고 제퍼슨은 "우리 백인의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즉 생존이라는 말이 언급될 정도로 조면기가 발명되기 전에도 흑인 노예라는 싼 노동력은 목화 산업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러나 목화가 기후에 별로 맞지 않아 담배같은 상업 농산물을 키우던 북부 주들은 임금 노동자보다 노예가 돈이 더 많이 들었기에[5] 조면기가 발명되기도 전에 노예 해방이 진행되고 있었고, 남부 주들에서도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다수는 아니었다) 엘라이 휘트니라는 발명가가 1793년에 실용적인 조면기를 발명하면서 바뀐다. 목화를 수확만 하면 쉽게 솜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때마침 한창 산업혁명을 진행하던 영국 덕분에 목화의 수요가 넘쳐나고 있었기에 남부의 농사꾼들은 목화 재배 면적을 대대적으로 늘려버렸다. 동시에 값싼 노동력의 수요도 폭증하면서 노예와 같은 값싼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시기 목화는 미국 남부 경제에서 큰 지분을 차지했기에 "목화 왕(King Cotton)"과 같은 말이 나오기도 했다. 기술의 발전이 도리어 사회적 퇴보를 불러올 수 있는 사례의 하나. 이 때 조면기를 발명한 엘라이 휘트니와 피니어스 밀러는 남부농장주들이 특허권 따위 없애고 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기계를 표절하기 위해 낸 소송에 패배하면서 망했다. 소송 패배와 복제품의 난립으로 조면기 사업은 망했지만 엘라이 휘트니는 총기를 제조해 정부에 납품하는 일을 하여 재기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발명품인 조면기가 본의 아니게 노예제의 존속에 기여한 것과는 별개로, 휘트니 본인은 노예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출처 - 세상을 바꾼 발명과 혁신)

이런 역사 때문에 미국 흑인 앞에서 목화를 언급하는 것은 대단히 큰 실례가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집트산 면화가 가장 유명했지만, 미국에서 목화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생산량이 크게 감소했다. 남북전쟁 동안 북군이 남군 돈줄을 끊기 위해 해상봉쇄를 하면서 잠시 부활할 수 있었지만, 남북전쟁이 끝나자 원상복귀 되었다. 현재는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서구에서는 면섬유 중에 이집트 면(Egyptian Cotton)을 최상품으로 친다. 섬유가 길어서 흡습성이 좋고 질기면서도 부드럽기 때문에 고급 침구류나 고급 셔츠에 쓰인다. 역시 ELS 품종인 페루 원산의 피마 면(Pima cotton)을 미국에서 Supima라고 하여 상표화했지만 이집트 면을 더 쳐주는 분위기다. 다만 이집트에서 생산된 면은 전부 이집트 면이라고 불러버리기 때문에, ELS(extra long staple)인지 확인해야 한다.

흑인 노예 문제뿐만 아니라 아동학대 문제도 심각했다. 조면기가 나오면서 의류 공장의 수도 늘어났고 옷을 만드는 기계 또한 많아졌는데, 이것이 고장날 때마다 수리하고 조율하는 일을 하는 건 기계 속에 들어가 실시간으로 고칠 수 있는 작은 아이들이었다. 공장법으로 제약하기 전만 해도 9살짜리 아이가 8시간 넘게 일하는게 일상이었고 팔다리가 기계에 잘리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노동법으로도 아이들이 일하는 걸 막지는 못했다. 일하는 시간만 줄였지.

일본은 799년에 곤륜인이 목화씨를 왜인에게 나눠주고 재배 방법을 알려줘 각지에서 재배하였으나 1년만에 중단됐다. 그 후에는 목화면을 조선에서 수입하다가 16세기부터 미카와 국(지금의 아이치현 동부)에서 처음 재배에 성공했고, 1960년대까지는 목화 농사가 흔했다. 그러나 한국과 마찬가지로 화학솜과 값싼 제3세계 목화에 밀려 자취를 거의 감추었다. 한반도와 달리 난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도호쿠 지방까지 목화 재배가 가능하다.

오키나와에도 문익점과 비슷한 인물이 있다. 기마 웨카타 신조(儀間親方真常)라는 자인데, 일본 본토에서 목화를 가져왔고, 중국에서 설탕과 고구마까지 가져와서 오키나와에 전파했다고 한다.

지금은 GMO(유전자 조작 생물)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식물로 유명하다. 식품으로 사용하는 작물이 아니기 때문에 유전자 조작 식물의 안전 논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 한몫하지만, 사실은 목화 재배의 부산물로 나오는 목화 씨에서 면실유를 추출하는데 전세계 식용유 생산 기준으로 대두에 이은 2위 생산량을 자랑한다. 단일 제품으로 팔리기보다는 주로 가공용, 혹은 혼합 식용유의 원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쉽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물론 정제된 식용유에서는 유전자 조작 관련 결과가 남지 않으므로 큰 의미는 없다.

인도에서는 중국산 목화씨를 싸게 사서 심었더니 전부 가짜 씨앗이어서 그해 농사를 망친 농민이 수두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역시 대륙의 기상.

소련은 국가별 분업화를 강조해 중앙아시아에는 오직 목화 농사만 시키도록 만들었는데,[6] 무작정 목화농사를 짓기 위해 강물을 다 끌어오다가 강줄기가 말라 세계에서 4번째로 큰 호수였던 아랄해는 죽음의 사막이 되어버렸고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별다른 산업기반이 없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지금까지도 경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냥 쉽게 얘기해서 중앙아시아는 카자흐스탄 빼면 다 못사는 나라들이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은 사람들을 목화재배에 강제로 동원해서 사실상 노예노동을 시켜서 오랜기간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참고로 한국조폐공사가 생산하는 대한민국의 지폐도 우즈베키스탄산 목화를 원료로 쓰고있다.

2. 전통 신발의 한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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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靴.
조선시대 중후기에 왕과 문무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신던 신발.영의정 패션의 Must have it item shoes 밑바닥을 나무로 만들었으며,[7] 겉을 가죽(주로 사슴 가죽)으로 싸서 장화처럼 만들었다. 현재 사극에서 쓰이는 것은 인조가죽 재질이며, 낡으면 흘러내려 루즈삭스 같은 모양새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보조출연자의 필수품. 하지만 전통방식은 밑바닥이 평평한데다 골이 파지지 않아 요즘 사람들이 신고 다니기 힘들어 사극에서 쓰는 물건들은 대개 현대의 신발처럼 밑창이 두툼하고 굽이 있고 골이 파진 형태다. 이거 갖고 고증 안 맞춘다고 하는 사람들 있는데, 배우들 발건강을 생각해서라도[8] 현대화된 목화가 낫다.[9]

3. 한국의 극단

공식 홈페이지.

극작가 겸 연극 연출가 오태석이 1963년 서울예술전문학교 내 동인극단으로 창단한 이래, 국내에서 손꼽히는 극단 중 한 곳. 현재 정식 명칭은 '목화 레퍼토리 컴퍼니'이며, 과거 캐피프레이즈는 "물레를 돌리는 마음"이었다. 現 대표 오태석은 한국 연극의 메카가 서울특별시 명동이던 시절, 현 서울예대의 창립자 유치진으로부터 사사 받았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로미오와 줄리엣, 템페스트 등 고전 명작들을 특유의 충청도 사투리와 화술로 재현함으로써 한국적 연희의 극치를 이뤘다고 평가 받는다. 주요 일간지에서 실시하는 극단 지명도에서 매번 1위를 지킬 정도.

목화 출신 연기자 중 연기력을 인정 받는 배우가 많아 배우 사관학교로 불리기도 한다. 인지도 높은 목화 출신 배우로는 박영규, 유해진, 손병호, 성지루, 김수로[10], 장영남, 황정민(1969) 등이 있으며, 특히 박영규는 대학로에 스승 오태석을 위해 전용 소극장 '아룽구지'[11]를 차려 운영하기도 했고, 장영남은 극단 목화의 가장 유명 레퍼토리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역을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 받는다.

오태석이 모교 서울예대에서 교수 생활을 오래 하였으므로[12] 서울예대 연극과, 극작과 출신 단원이 다수이며 때문인지 과거엔 군기가 매우 엄하기로 정평이 나있었다. 상기한 것처럼 대부분의 단원이 서울예대 선후배 출신이면서도 극단 목화에서는 무슨 해병대마냥 극단 기수로 회식 배석이 이뤄질 정도(...)였지만, 2010년대 들어 이것도 어느 정도는 옛말이 되었다. 진짜?

2000년대 중후반부터 레퍼토리 극단답게 <심청이는 왜 인당수에 두 번 몸을 던졌나>, <백마강 달밤에>, <천년의 수인> 등 검증된 창작극과 함께 셰익스피어 위주의 번안극을 연례 공연하고 있으며, 영국, 프랑스 등 해외 공연도 잦은 편이다.

[1] 비슷하게 지력을 잡아먹는 식물로는 옥수수, 인삼 등이 있다.[2] 이런 향수들의 향은 보통 깨끗하면서도 포근하고 보송보송한 세탁물/옷감의 느낌이 난다고 표현된다. 소위 말해 포근한 비누향.[3] 문익점은 고위직에 집안 빵빵한, 흔히 말하는 권문세족 출신이기 때문에 목화 같은 거 신경 안 써도 그냥 먹고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고, 남명 조식은 그 정신을 높게 평가하여 '삼우당문공묘사기'를 짓기도 하였다.[4] 일본 면화는 한 때 전적으로 조선에서의 수입량에 의존했으나 무로마치 막부 말기에 미카와에서 재배에 성공하여 점점 수입 물량을 줄였다.[5] '노예가 무슨 돈이 들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돈이 많이 든다. 임금만 지급하면 끝인 일반 노동자들과는 달리, 노예는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공하고, 노예들이 도망치지 않고 일을 똑바로 하도록 감시하는 감시원을 따로 고용하는 등의 비용이 필요했다. 당연히 이는 모두 노예 주인이 부담해야 했다.[6] 우즈베키스탄의 노력영웅 김병화도 식량을 생산하다 1950년대 정부의 명령으로 목화 농사를 해야 했다.[7] 그래서 목화(木靴)라고 한다.[8] 특히 몸 쓸 일이 많은 스턴트맨들의 경우는 더 하다. 짚신의 경우에도 속에 신발을 신고 버선을 덧신은 다음 다시 짚신을 신을 정도다.[9] CG로 하면 안 되냐는 의견도 있긴 한데, 어차피 신발은 시청자들의 시선이 잘 가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괜한데 돈과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다. 그래서 양덕들이 판치는 서양의 경우도 신발은 적당한 선에서 넘어가는 편이다.[10] 한때 KBS 상상플러스에서 시연해 유명해진 꼭지점 댄스의 경우, 김수로가 목화에서 <백마강 달밤에>라는 작품을 공연/연습하던 시절 완성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방영분 참조.[11] 2008년경, 오태석이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하며 없어졌다.[12] 현재는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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